십일조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조건은 된다고 봅니다.
이미 전에 십일조에 대해서 정리하여 놓은 것이 있어서 올립니다.
인터넷의 기독교의 게시판에 가면 십일조에 대해서 열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장면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적으로 보면, 그러한 토론이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곳과 안티기독교들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숨기며, 한국교회의 십일조를 비난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십일조를 남용하는 교회가 있다고 하여도, 십일조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일부 극소수 목사들의 범죄나 강요를 전체 기독교의 비리로 간주하는 것은 고의적인 비난의 목적일 뿐입니다.
최근에는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같은 소위 이단으로 불리는 자들이 십일조를 비난하는데, 이러한 비난은 오히려 일반 교인들의 많은 동조와 동감을 얻게 되며, 그들이 노리는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십일조자체를 비난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기독교의 전체적인 비난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서 자신들의 전체적인 이단 교리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우리나라에 재정이 풍부한 교회는 10%도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중에서 80% 이상이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단교회에서 일체의 헌금이나 연보, 헌물등을 받지 않을까요?
그들은 단지 십일조라고 불리는 용어의 헌금만이 없을 뿐이며, 헌금을 모두 받습니다. 특히 이단들의 경우 더욱 많은 헌금을 받음으로 상당한 피해를 보게 됩니다. 더욱이 통일교는 십의삼조(30%)를 받고 있으며, 많은 이단들이 교인들의 재산을 교회로 헌납하도록 강요하고 있는데, 그러한 자들이 앞장 서서 일반 교회의 십일조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이단과 사이비에 미혹되어 그들의 전재산을 잃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특히 이단들이 종말론을 주장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전재산을 바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면 안됩니다.
십일조는 자발적인 것이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외에 어떠한 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비난은 보편적으로 몇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봅니다.
1)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하여졌다는 주장
십일조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주장중 첫번째는,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지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적은 없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을 위하여 오셨으며(마5:17) 예수님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5:18)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개념이 폐하여졌다는 것이다.
제사율법은 변역되었다....변역이란 바뀐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사도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제사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만일 제사가 폐하여졌다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아니고, 우리도 더이상 제사장이 아니다.... 율법은 그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관점과 의롭게함이라는 관점에서는 폐하여졌으나, 죄를 깨닫게하고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은 아직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재해석하셨으며, 완전케 하신 것이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그렇다면 십일조는 율법일까?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자가 높은자에게 복빎을 받았느니라"(히7:6)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전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그리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빔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면서 복빎을 받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뿐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교회에서 십일조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이단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떤 정통교회도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정통교회도 없듯이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내야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의무라고 가르쳐야만 한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
마태복음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42절은 십일조에 대해서 모두 똑같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눅11:42)
신약에서 십일조는 마23:23, 눅11:42와 눅18:12에서 다시 한번 언급되어지며, 히브리서에도 십일조는(개역성경:십분의 일로 번역되어짐) 언급되어진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2-14)
전자의 성경본문은 형식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탓하시는 것이지 십일조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십일조를 성경적이 아니므로 폐하여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 말씀도 잘못이라고 비판하기 바란다
"의인"(의롭다함)의 조건은 마당에 심은 풀과 같이 자신의 소득에 대한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에 달려 있다. 만일 의롭다함의 조건이 십일조에 달려있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3) 연보와 십일조
또 제가 또 하나의 성경을 인용하면, 십일조를 비난하는 분들께서는 분명히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연보이다"라고 말할 것이 뻔하지만 성경을 잘 찾아 보면, 연보와 십일조는 서로 구별되어지거나 다른 용어가 아니다.
고전 16장 1절과 2절등에 사용된 "연보"란 단어는 "모금, 수집"(collection)이라는 뜻의 헬라어 "로기아"로 되어 있고, 고후 8:2에서는 "기쁨으로 드린다, 관용"이라는 의미의 "하플로테스"로 되어 있고, 고후9:5 에서는 "좋은 모금, 아름다운 말과 칭찬, 봉헌, 은전"이란 뜻의 "율로기아"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에서 "연보"란 번역상 연보라고 표기되어 있을 뿐, 십일조나 헌금. 모금과 전혀 다른 용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십일조를 형식적인 면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기쁨으로 드려진다면 그것이 곧 연보와 같은 개념이 되어진다.
또한 그 증거로 역대하34장9절과 14절의 "연보"란 용어를 보자.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포함한 성전세등을 포괄하여 성전에 들어간 돈을 연보(히브리어: 보, 여호와의 성전에 입고된 돈)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고후 9:13에서 "후한 연보"(하플로테스)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아직도 헬라어 원어를 믿지 못하겠고 십일종는 "연보"와 엄격히 다른 용어라고 말한다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십일조 봉투에 십일조라는 말을 지우고 연보봉투라고 고쳐서 내거나 "기쁜 헌금"이라고 고쳐서 내면 된다. 연보는 성경적이라 가능하고, 십일조는 폐하여졌으니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은 가당치 않다. 십일조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니 십일조의 의미를 잘 깨달으시기 바라며, 주님은 결코 십일조가 폐하여졌다고 하시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기쁜 헌금" 안에 십일조도 헌금도 모두 포함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즐겨 내시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십일조는 결코 폐하여진 적이 없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1-44)
예수님은 액수에 많고 적음이나 정확한 액수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오직 자발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내면적인 믿음을 중요시하였다.
4) 십일조의 유래와 의미
성경에서 십일조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창세기 14장 17-20절이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에 등장하는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28장 야곱의 서원에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를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28;20-22)
즉 십일조는 제사적인 의미도 아니며 율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미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으며, 야곱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서원한 것이다.
그것은 복을 빌어달라는 조건으로, 드리는 사람의 자발적인 약속이다. 단, 그것은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 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다시 말해서 구약의 십일조란 일차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적인 제물로 사용되었다.
후에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분깃이 없는 레위 제사장들을 부양하는 목적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와 부양에도 쓰였다는 것이다. 이 십일조의 대상은 종교적인 레위인의 부양도 포함되었지만, 성중에 거하는 객과 과부와 고아같은 비종교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이단들과 사이비 교회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이 모두 교주나 지도자 개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생계와 생활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우리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구제사업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선교비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공동체적인 교회를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다만 십일조나 헌금은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재정부에서 취급한다.
목사나 교역자는 정해진 월급을 받고, 모든 지출은 회계 처리되어 지며, 회계보고와 감사를 받게 되어 있으며, 예산 및 계획은 당회와 임원회에서 통과되어야만 하며, 모든 과정은 공개적으로 처리되어진다.
또한 재정부와 감사는 정해진 년수마다 다른 평신도로 교대되어져야만 한다.
5) 신약의 십일조
여러분이 흔히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등장하는 구절인데, 마태복음23;23-24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도다"(마23:23-24)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음식의 향을 내기 위한 아주 작은 풀이다.
이러한 풀에 속하는 것은 십일조의 규정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러한 식물들은 그 당시 집의 뜰에서 길러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은 이러한 규정까지를 십일조에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이렇게 까다롭고 철저한 당시의 율법과 계율에 대한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대한 비평일수도 있으며.......
둘째 이렇게 작고 우리 집안에서 키우는 풀의 열매까지 우리는 정확한 액수를 내고 있다는 자랑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례에 대한 비평이다.
그들은 내면적인 믿음보다 십일조를 내는가 안내는가에 대한 것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풀까지의 정확한 십일조를 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작은 것까지 지킨다는 외부적인 평가를 받기위한 전시적인 쇼맨쉽을 비판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한 해석은 곧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실제로는 약대를 삼키는 행위를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던 예수그리스도는 "버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어서 율법의 지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의미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의 형식도 중요한 것이며 그 내면적인 의미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구약의 십일조에서 가장 처음 언급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자.
히브리서 7장은 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멜기세덱은 과연 누구인가?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다.
살렘의 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살렘이란 뜻은 "평화로운, 충만한, 완전한..."이란 의미가 있다.
이 멜기세덱은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를 축복해 주었다.
히7장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4절 "가장 좋은것"을 주었고 7절에는 "낮은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낮은 자로서 높은 자인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았고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바친 것이다.
이것은 레위라는 제도가 있기 전에(즉 율법이 있기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율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멜기세덱은 단지 축복을 하였을 뿐이며 "달라"거나 "십분일"을 말한 적도 없고 "가장 좋은것"에 대하여 말한 적도 없다.
이 멜기세덱은 바로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모형인 것이다.
우리의 십일조는 바로 우리 주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자발적으로 드려져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의 살과 피로써 우리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셨고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합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나 액수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리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죽을 자들이 십분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7:8-10)
예수그리스도도 십일조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금하지 않으셨다.
단지 예수님은 그 내면적인 것을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며, 사랑과 공의로 믿음으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십일조를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교회는 그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그 물질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쓸수도 있으며, 목회하는 분들에게도 써질수도 있으며 구제하는 일에도 사용되어질 수도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비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반드시 내야한다는 형식도 중요한 것이며 버릴수 없는 것이지만, 자발적이며 내면적인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찾을수 없다.
5) 말라기에 대한 잘못된 비판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십일조에 대한 말라기 말씀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본인은 두가지의 비판을 하려고 한다.
하나는 성도들이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를 내야만 복의 근원이 된다는 주장이며, 하나는 이 말라기 말씀이 오직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이 문장을 그 당시의 "제사장"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린다.
즉 말라기는 제사장에게 하는 말씀인데 한국교회가 그것을 성도들이 대상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
말라기 2장은 분명히 그 대상이 "제사장"이다.(말2:1)
그러나 말라기 3장6절부터는 그 대상이 "제사장"이 아니다.
3장6절은 "야곱의 자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대상으로 "돌아오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7)
과연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경고가 오직 제사장에게만 해당되어질까?
그 대상은 온 이스라엘 백성, 너희 온 나라인 것이다.
먼저 말라기에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느냐?" 라는 문장을 보자.
이 영어성경을 보면 "Will a man rob God?"이다.
우리는 이 man 이라는 단어에 부정관사 a 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럴 경우, 의미는 한사람의 뜻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말한다.
A horse is animal. 이 말은 한 마리의 말이 동물이다가 아니고 일반적인 명사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짐승이다" 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친 사람은 제사장같은 어느 특정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모든 전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How do we rob you? 라고 we 라는 복수가 곧이어 나오는 것이다.
다음 9절에서는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영어성경을 보면 " You are under a curse - the whole nation of you - because you are robbing me" 라고 되어 있다.
(- -) 라는 부호는 앞의 문장을 재설명하는 부호이다.
앞문장의 You 는 결국 the whole nation of you 라고 재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역성경에도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성경말씀은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일 You 가 제사장만을 말한다면 복을 주는 "너희"도 제사장을 말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복은 제사장만이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십일조는 일반 사람들이 내고 복은 제사장만이 받는다는 이상한 모순이 되어 버리는것이다.
어느 문장을 보아도 You는 제사장을 가르킨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오직 2장에서 "너희 제사장들아..."라고 되어 있다고 모든 말라기가 다 제사장에게만 말하는 것이라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말라기 3장에 들어서면서, 3장 3절에는 레위자손들을 "그들"이라고 삼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미 제사장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과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것이니라"
이 문장이 제사장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들은 'They" 가 아니고 "You" 가 되었어야 한다.
6절에서는 "야곱의 자손들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도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리라"
레위족속 제사장만이 야곱의 후손이 아닌것이다.
야곱은 모든 열두지파의 조상인것이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여호와는 부르고 있었으며 모두에게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저주의 원인중에서 한가지를 알려줌으로써 복을 알려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또 말라기에 대해서 정확한 액수(10%)를 내야만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물론 본인은 정확한 십일조를 계산하여 자발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그 믿음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성경에서 "온전한 십일조"라고 번역되어진 10절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확한 금액의 액수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Whole tithe"(모든 십일조:히브리어 콜, all)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십일조, 즉 모두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것을 말하지만, 마당에 심는 박하와 휘향과 산채까지 포함시키는 정확한 십분의 일이라는 액수를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 온 나라, 모든 백성이 모든 십일조를 도둑질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들은 남이 볼 때에는 박하와 휘향과 산채까지의 십분지일을 나는 낸다고 자랑하였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소득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아예 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십일조를 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서 십일조는 결코 율법적이 아니며, 폐지된 적도 없다. 다만 십원짜리까지 계산하는 정확한 10퍼센트의 액수만을 맞추는 형식적인 십일조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람직한 십일조가 아닐 수도 있다.
박하나 회향과 근채까지 십일조의 액수를 정한 것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주님은 바람직하다고 하신 적이 결코 없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5-7)
빌립보서 4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에게 모금한 돈의 일부를 바울의 "쓸 것"으로 몇번 보내었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그러나 내가 선물을 구하지 않는다고 사양한다.
그러나 18절에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준 너희의 준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한 것이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 ( http://cafe.naver.com/anyquestion/20369 )
십일조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
맹목적인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십일조가 폐지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1) 예수님의 말씀
신약에서 예수님이 직접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눅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가정 정원에서 기르던 채소였다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집 마당에서 기르는 하찮은 채소까지도 십일조를 정확하게 지킨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외식과 형식에 치우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비판을 하십니다. 즉 십일조는 이러한 형식이나 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인 의와 인과 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 더 중한 바"라고 말함으로서 그 의와 인과 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의와 인과 신도 중요하지만,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그 내면적인 의와 인과 신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형식적이고 과시적인 십일조라고 할지라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이것 하나로 십일조는 버리지 말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달합니다. 즉 십일조는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공동번역]마 23:2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표준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현대인의성경]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저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2) 사도바울의 연보
고전 16: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공동번역] 내가 여러분에게 간 다음에야 비로소 헌금하느라고 서두르지 말고 여러분은 일요일마다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 두십시오.
[표준새번역]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은 일요일마다 각자 자기 수입에 따라 얼마씩 따로 떼어 놓아서 내가 갈 때 헌금을 거두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본문은 십일조가 아니라 연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연보는 “로기아”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모집, 수집, 헌금”(gathering, collection)이라는 뜻입니다. 즉 수입에 따라 얼마씩 떼어 놓았다가 헌금을 하는 것으로 십일조와 다르다고 구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일조라는 용어가 싫은 사람은 연보라고 쓰든지, 또는 헌금이라고 써서 수입에 따라 저축하여 놓았다가 내면 됩니다. 용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요? 십일조도 연보의 일종입니다.
연보라는 명칭이 성경에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연보라는 명칭은 고후 8:2에서는 "기쁨으로 드린다, 자선, 관용“이라는 의미의 "하플로테스"로 되어 있고, 고후9:5 에서는 "좋은 모금, 아름다운 말과 칭찬, 봉헌, 은전"이란 뜻의 "율로기아"로 되어 있습니다. 즉 자발적인 헌금, 기쁨으로 내는 것이 곧 연보인 것입니다.
(3)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십일조도 폐기되었다는 주장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십일조도 폐기되었다는 주장은 자칫하면 이단적인 주장이 됩니다.
율법은 폐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두가지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 있는데,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지키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주장과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적인 주장의 두가지입니다. 전자는 구원파에서 발견되고, 후자는 행위구원론자에게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8)
폐기된 것은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율법의 기능입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기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예를 들면 율법에서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을 하면 안된다고 하였으므로, 우리는 그것들이 죄라는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살인과 도둑질,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있으므로서 우리는 무엇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롬5:13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과 같은 명절과 절기를 지키라든지, 제사를 지키라는 기능은 비록 폐하여졌지만, 그 예표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으로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구약의 명절과 절기나 장래일의 그림자이고 예표이지만, 그리스도가 그 실체가 됩니다. 또한 구약에서 짐승의 피로 바쳐진 제사의 온전한 성취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서 단 한번의 제사로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사법이나 절기 명절에 관한 율법은 그림자로서 예표로서 남아있으며, 그 실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일조도 폐하여졌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만약 그런 논리를 주장한다면, 율법에서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율법이 폐하여졌으니 간음과 도둑질과 살인을 하여도 좋다고 말할 사람이 있는지요?
물론 필자는 십일조를 반드시 강제적으로 내어야 한다든지, 정확히 1/10의 액수를 계산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내면 됩니다. 다만 십일조는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율법적인 십일조가 폐하여진 것이 있다면, 신약에서의 십일조는 제사장, 즉 레위지파의 생활비로 지급되는 십일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십일조를 목사가 갖는다?
물론 나쁜 목사도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일부 목사들이 교회 돈을 맘대로 쓰다가 성도들에게 고발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경우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들이 엄청난 돈을 쓴다고 비난합니다. 물론 재정이 넉넉하여 풍족한 비용을 보장받는 목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는 전체적인 교회수에 비하여 지극히 적은 숫자이며, 대부분의 목사들은 생활비조차 부족합니다. 특히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는 관리비조차 부족합니다. 일부 극소수의 경우를 전체적인 경우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단적인 교회나 특별한 극소수의 경우를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정상적인 교회는 십일조나 헌금이 평신도들로 임명된 재정부에 의하여 계수되고 관리됩니다. 그 재정에서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의 관리비가 지출되는 것이 원칙이며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교회도 재정이 필요합니다. 그 재정을 십일조와 헌금으로 지불하게 되는 것으로서, 수입이 많은 사람은 많이 내고 수입이 적은 사람은 적게 내는 것이 교회의 방식입니다. 무리한 헌금을 한다고 하여 천국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며, 그런 방식은 이단교회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전세금을 빼서 월세로 옮겨 헌금을 한 교인을 칭찬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다니지 마십시오. 남에게 돈을 꾸어 헌금을 해야만 믿음이 큰 교인이라고 칭찬하는 곳이 있다면 그 교회는 건전하지 못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성경적인 것이며 폐하여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필자도 십일조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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